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만 알려졌던 김구(金九)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 실은 건국 초기 좌익과 연루돼 있었고, 1948년 발생한 여순반란사건과도 관련돼 있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정년 퇴임 후 더욱 왕성한 집필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조맹기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명예교수가 12일 ‘자유와정의를실천하는교수모임(자교모) 제10차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김구의 좌익 활동과 그 유산–여수사건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연구 발표문이 조명받고 있다.
‘1948년 여순반란 김구 배후설 검토’라는 별도 부제를 단 논문은 김구의 정치 활동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면서, 그의 행적이 여순사건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심도있게 분석했다.
조 명예교수의 논문은 김구의 정치 행적, 특히 그의 좌익적 활동과 폭력적 수단의 사용 여부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48년 여순사건의 배후로서 김구가 연루되었는지를 고찰한다.
조 명예교수는 김구를 ‘테러리즘 전술’을 빈번히 사용한 인물로 정의하며, 그의 항일투쟁과 해방 직후 정치 행위 전반에 걸쳐 공산주의 세력과의 협력·좌우합작 지지·남북협상 추진 등의 사례를 통해 김구의 이념적 모순과 좌익 성향을 강조한다.
특히 발표는 여운형·송진우·장덕수 등 주요 정치인 암살 사건이 김구 및 그 측근들과의 연계 하에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테러 행위가 단지 일제에 맞선 항일투쟁의 연장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한 내부 제거였다는 점을 문제시한다.
또한 김구의 1948년 5.10 총선 보이콧과 남북협상 참여, 그리고 이후 여수·순천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 반란(여순사건)까지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며, 김구의 활동이 좌익계열 무장봉기의 분위기 조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논문은 김구가 ‘대한민국의 법통’을 주장하기에는 지나치게 폭력과 급진성을 내포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임시정부 역시 조직적 테러를 수단으로 했던 점에서 민주적 정통성과는 거리가 있다고 비판한다.
발표자는 이승만의 외교 중심 독립운동과 합법주의적 접근을 김구와 대비시키며, 현재의 김구에 대한 긍정적 역사 인식이 1980년대 이후 종북주사파 세력에 의해 조작된 역사 프레임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조맹기 서강대 명예교수의 발제문 전문이다.
◆김구의 좌익 활동과 그 유산-여수사건을 중심으로
1. 김구의 좌익 활동
뉴스를 판별한 때 사건과 사고를 구분한다. 사고는 자연의 현상으로 일어남으로써 사실을 규명하고 그 사건에서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건은 행위자의 의도로서 인과관계를 규명해야 함으로써 왜곡된 뉴스에서 바른 사건상이나 인물상을 파악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같은 인물의 행적은 겉과 속이 많이 달라 정확하게 분석하여 논리를 찾기가 난제이다. 그 결과 연구자는 많은 부분 설(說)로서 평가를 해야하는 한계를 경험하고 된다.
정안기 박사는 저서 ‘테러리스트 김구’(2024)로 도발적 시도를 했다. 그것도 출간과 더불어 한동안 언론에 크게 부각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테러와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를 세계 최초로 고안한 인물은 영국 보수주의 정치의 시조 에드먼드 버크(1729〜1797)다(정안기, 2024, 15쪽).
버크는 프랑스 혁명 발발 직후인 1790년 펴낸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이란 저작에서 혁명의 과격성과 급진성을 비판하고자 ‘테러 테러리즘’(미주1)이란 용어를 고안해 냈다. 테러와 테러리즘은 유사한 용어로 정착하면서 ‘공포와 충격을 유발하기 위한 정치적 폭력 행위’로 간주했다.
정확하게는 “한 국가에 대하여 직접적인 범죄 행위를 가하거나 일반인들의 마음속에 공포심을 일으키는 행위, 특히 정치적인 동기에 따른 의도되고 계산된 폭력 행위로 규정지었다”(김태영·문영기, 2022; 정안기, 2024: 16).
인력과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은 노력으로 극적인 효과를 볼 때 테러와 테러리즘은 좋은 전술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테러 행위는 아주 빈번히 그리고 비밀스럽게 이뤄졌다. 그렇다고 1945년 이후 테러와 테러리즘이 거세되지는 않았다. 한번 맛을 들이면 중독성이 있는 것이 살상을 자행하는 일이다. 테러는 공포 분위기 조성에 일품이다.
더욱이 상해임시정부의 공적 기구에서 테러와 테러리즘 자행은 대한민국 법통을 이야기 할 때 퍽 우려스러운 측면이 존재한다. 현실적으로 임시정부는 ‘조직적 폭력’을 늘 해오던 것으로 간주한다. 그 구성원들은 ‘독립’의 목적을 위해 그 수단으로써 ‘공포와 충격을 유발하기 위한 정치적 폭력 행위’를 계속했다.
북한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향해 테러를 자행했다. 그게 대한민국의 운명이다. 같은 유형 테러를 북한 김일성 그리고 김정일 김정은 집단은 계속한다. 그칠 줄 모른다. 동일한 맥락에서 김구에게도 테러와 테러리즘은 늘 문제가 되었다(미주2).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은 폭력과 테러가 늘 행해지고 있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헌법 정신을 갖고,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대한민국 형식과는 전혀 다른 이색적 관행이다. 그렇다면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법통 일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일본은 강점기 시대 대량학살·방화·고문·감금·살해 등을 한국·만주·중국에서 자행했다. 이는 항일 정신을 말살시키고, 일본인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킬 목적이다(Syngman Rhee, 1941: 64). 이승만과는 달리 실제 김구의 행적을 봐도 북한 공산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빈번히 공정·정의를 도외시하고 폭력과 테러를 불러들였다.
정안기 박사는 ‘김구는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반란사건 역시 김구의 테러리스트 활동과 관련이 있다’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본 토론은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대구폭동·제주4·3사건·여수반란사건 등의 규명과 함께 그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좌익의 역사관은 전혀 다른 평가를 선보이지만, 김구가 공산주의자들과 연대를 한 것이 많은 자료로 밝혀지고 있다. 즉, 김구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를 자처했으면서도 1926년·1942년·1944년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이념을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을 했다(김종항·안우생, 1986: 11; 정안기, 2024: 421∼2).
더구나 해방 이후에도 좌익과의 연대는 계속되었다. “1945년 11월 환국 직후 한민당과 이승만이 대한독립촉성중압협의회 참여를 거듭 촉구할 때도 좌우합작이 자신의 기본노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서울신문, 1945.12.21). 오히려 1945년 12월 21일 임정 산하에 ‘특별정치위원회’(서울신문, 1945.12.25)를 설치해서 인공과 합작 혹은 좌우를 망라한 정당통합을 추진했다(미주3)”(정안기, 2024: 422).
한번 좌익화되면 그 올가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전향이 쉽지 않은 대목이다. 그러나 역사 평가는 다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환상하는 김구는 종북주사파가 만들어 낸 역사적 허상이다. 이런 논리라면 ‘가짜 뉴스도 계속 들으면 진짜가 됩니다’라는 설명이 가능하다(최훈, 2025.05.28). 좌익이 늘 쓰는 세뇌 방법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정체성을 잃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종북주사파는 사회악의 모든 근원은 친일·친미 청산에 있다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초해서 이승만 깍아 내리기를 위한 대항마로 김구를 띄우기 시작했다. 종북주사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로젝트로 회자되는 ‘김구 띄우기와 이승만 깎아내리기’의 역사 공작은 ‘통일의 화신 김구,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재구성되며 한국인들을 세뇌시켰다”(정안기, 2024: 427).
테러 행위는 작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역사 왜곡 쯤이야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정의일 수는 없다. 한국사 연구학자인 중국의 시위안화(石源華)는 한국독립운동 과정에서 암살은 일정 부분 관행화되었으나 국제법 차원에서 볼 때 이런 투쟁은 국제적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고 비판한다. 즉 암살·테러는 국가를 생사존망의 위기를 구하기는 역부족이다(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관리처 편, 36쪽; 김승일 역, 2005; 김용삼, 2025: 14).
또한 테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정식 군대 창설’은 여순사건과 맞물리는 대목이다.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은 1932년 12월 김구 주석과의 회담에서 암살·테러에 젖어 있는 김구에게 뼈 있는 충고를 내놓는다. “특공을 통해 천황을 암살하면 다른 천황이 또 나올 것이고, 대장을 죽이면 다른 대장이 또 나올 것이니 독립전쟁을 목표로 한다면 임정은 우선 무관을 양성하여 정식 군대를 창설하는 것이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라고 조언했다(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관리처 편; 김승일 역, 66쪽; 김용삼, 2025;14).
같은 맥락에서 이승만도 김구의 테러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체류하며 독립운동 단체들이 추구했던 암살·파괴·폭력 투쟁 방식에 대해 비판을 계속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의거라도 미국 언론이나 시민들의 눈에는 ‘암살자는 흉악한 악당’ 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서 폭력을 동원한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해 줄 뿐이라는 교훈을 얻었다(김용삼, 2025; 14).
그는 재미동포단체 신문인 공립신보의 기고문을 통해 “남과 대적하려면 내가 먼저 준비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학문의 숭상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장투쟁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외친 것이다(이승만, 1908.08.12).
또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은 만주·연해주가 아니라 세계의 수도 미국 워싱턴으로 보았으며, 암살·테러 방식의 독립운동이 아니라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미국 내 지인들의 협조를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국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이 발표되도록 유도한 것이 이승만 외교 독립운동의 구체적 성과다”라고 했다(김용삼, 2025; 15).
한국의 독립은 카이로선언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 독립운동가들의 항일무장투쟁이나 암살·테러 방식의 의열투쟁의 결과물이 아님이 역사적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가 1943년 9월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1943년 12월 미·영·중 거두들이 카이로선언에서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라고 발표했다(조맹기, 2024; 227). 그러나 그 문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얄타(Yalta)에서 1945년 2월 뉴스벨트와 스탈린이 분할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또한 독일 포츠담(Potsdam Declaration)에서 1945년 7월 26일 실제 ‘미·소분할 통치’가 다시 확인되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장제스(蔣介石)(소련 서기장 스탈린도 8월 서명함) 등이 참여하여 13개 조항에 서명했다. 그 전문에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 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용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선언문 제8항에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의 규정이 있었고, 제10항에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등이 있었다(포츠담선언).
한편 김구(미주4)의 테러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중국 상해를 비롯한 경성과 도쿄를 무대로 1920년 경성에서 사이토(齊藤) 총독저격 등 4건을 시작으로 1934년 상해 일본신사 급격까지 총 19건을 기록했다. 당시 프랑스영사관은 임정을 ‘테러 집단’, 김구를 ‘테러의 수괴’라고 단정했다”(정안기, 2024.08; 21). 해방 이후 임정의 정통성에 반기를 든 송진우 같은 인물은 반드시 테러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1945년 12월 송진우 암살은 김구·한독당 계열이 민족주의 광신자 한현우를 사주해 당시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를 찬탁론자로 몰아 암살했고, 한현우는 김구·한독당의 지원을 받아 당시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겸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을 민족반역자로 몰아서 암살한 테러 사건이다”(정안기, 2024; 32).
2. 해방 후 김구의 좌익 활동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미주5)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한민국의 초대 여당이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하였다.
한편 1946년 3월 해방정국에서 우익의 유력 정당으로는 한민당(김성수)·한독당(김구)·국민당(안재홍)·신한민족당(권태석)이 공존했다. 그 중 한독당과 중도파의 국민당이 함께하기로 하면서 우익 통합이 점쳐졌다. 그러나 우익 내 좌우합작은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 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사회노동법 규정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곤란한 ‘무서운 독소조항’이었다”(정안기, 2024: 377)라는 정책으로 좌우 갈등이 예고 되었다.
임정 주석 겸 한독당 집행위원장의 움직임에는 항상 공산주의 정책이 어른거리고, 스탈린·김일성의 폭력과 테러 행위가 빈번히 노출되었다. 1955년 서울특별시경찰국이 작성한 ‘한국정당사·사찰요람’은 “김구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당리적(黨利的) 의욕은 그칠 바를 모르고 1947년 12월 2일 (대한보국)의용단에게 지령하여 당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를 살해했다”고 적혀 있다(서울특별시경찰국사정과, 1955: 37∼38; 정안기, 2024: 403).
한편, 여기서 촉성(促成)은 ①재촉하여 빨리 이루어지게 함 ②인공적인 조건을 가하여 빨리 자라게 함이었는데, 그것도 노선 갈등으로 의미가 없어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8년 12월 26일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또한 신탁통치를 반대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뭉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독립촉성국민회·국민회·독촉국민회·독촉·대촉국 등 약칭으로 명칭을 달리했다. 당시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가 김구였다. 또한 오세창·이시영 등 구(舊)개화당 및 독립협회 출신 인물들도 합류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로 개명하여 재발족하였으나 이후 김구·김규식 등의 남북협상파는 제헌국회 총선에 불참을 선언했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되며 그 구성원들은 이후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과정,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제헌헌법 제정 등에 공을 세운다.
한편,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단계임으로써 민족진영에서는 그날 국민회 총재인 이승만 박사가 우거하고 있던 이화장에 모여 이 박사 주재하에 민족진영의 행동통일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전국 애국정당 및 사회단체는 동일보조를 취하게 되었고, 그 다음날인 1월 28일에는 172단체가 행동통일을 할 것을 서약서에다 서명 날인하고 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단결로써 매진하게 되었다(조병옥, 2003: 188∼189).
이 역사적 순간에 민족 진여의 가장 유감천만한 사실이 야기되었다. 그것은 ‘중앙협의회’를 구성하여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하기 위하여 행동통일의 거보를 내딛게 된 다음 날인 1월 29일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 씨가 동당을 대표해서 유엔한국위원단에게 다음과 같은 정치적 의견을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①미·소 양지구 주둔군 동시에 철수할 것 ②그후 남북 정치요인이 협의할 것 ③이 남북협상 후 선거를 실시할 것 등의 3개 조항이었다”(조병옥, 2003: 189). 이러한 “김구의 정치적 의견의 표명은 적색 좌익계열이 반 년 전부터 주장하던 구호를 대변한데 지나지 않고 하여 한민당과 국민회에선 비난성명까지 발표한 일이 있었다”(조병옥, 2003: 189).
물론 좌익은 벌써 활동을 개시했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좌익계열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통일 전선이 결성돼 강력한 조직력을 앞세워 정치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우익진영에서도 정당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정안기, 2024: 375). 좌익은 조직력을 앞세워 정치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해 2월 5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본부에서는 172개 단체가 뭉친 중앙협의회 간부회의를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 결의에 따라 그해 2월 16일에는 시공관에서 4개 청년 단체 대의원들이 집합하여 구국청년연맹을 결성하여 총선거 촉진운동에 전위대로서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간부회의 결과는 “민족진영에서 주장하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찬성하는 의견을 참작하여 그 잠정적 결론을 유엔 소총회에 보고하였다”(조병옥, 2003: 192).
또한 “나는 콜롬비아 싱코비치 교수로부터 개인적 지도를 받아 공산주의의 본질과 공산주의의 파괴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들이 북행을 하여 남북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등의 결론도 못 얻고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하였다”(조병옥, 2003: 192∼3). 나는 김규식 박사를 방문하여 3시간 동안 면담하면서 ”현존 국제정세하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정부 수립을 위히하여 협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협상 하기 위해 북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허행이 될 뿐 아니라 마침내는 정치적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와 경고 하였던 바 당시 김규식 박사도 나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고 북행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다”라고 했다(조병옥, 2003: 192∼3).
또 김구 주석으로 말하면 “내가 직접 가지 않고 김구 주석의 정치자금을 대주던 강익하(康益夏)를 통하여 김구 주석의 북행을 적극 만류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으나 한독당의 결정된 방침에 의하여 김구 주석은 마침내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게 되어 그의 정치적 존재는 국민 앞에 말살되는 불행한 운명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조병옥, 2003: 193).
한편 조소앙(趙素昻·1887~1958)은 남북협상을 하기 위하여 이북엘 가기는 갔으나 협상의 앞날이 뻔히 내다보이는 것은 물론 더욱이 어디를 가든지 뒤를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을 벗어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기회를 잘 노리는 그는 다른 인사들보다 재빠르게 월남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북 공산주의자들의 정체를 폭로한 일을 했다(조병옥, 2003: 193). 물론 김구·김규식 양 씨도 내가 예견한 대로 별다른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쓸쓸히 그냥 월남했다. 그리하여 중간파들을 중심으로한 소위 남북협상파들의 정치 생명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국민에게 인식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남북협상파들이 현실과는 유리된 정치적 몽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민족진영에 있어서는 남한의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만반 준비에 분망하였다. 내가 창안한 향보단은 방방곡곡에 조직되었고 경찰은 경찰대로 모든 치안 유지에 전력을 경주하였다(조병옥, 2003: 193).
그러나 좌익 공산당원들의 집요한 파괴행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조병옥, 2003: 193). 파괴행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하지 중중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Army CIC)의 정보에 의하여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경찰정보를 통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조병옥, 2003: 194). 더욱이 좌익의 파괴행위는 날이 갈수록 심하여 1948년 2월 7일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 통신·전기·철도 등 모든 기관에서 전평(全評)의 지령에 의하여 총파업을 단행하고, 또 학교의 스트라이크를 선동하여 경남북 양도와 제주도 등지에서는 경찰서 및 지서들을 습격하고 공무원과 우익인사들을 살해하여 폭동을 꾀하였으나 철통같는 경찰이 조직망과 항보단의 애국적 행동으로 수일 내에 질서가 회복되었다.
3. 대구폭동·제주도4·3 사건 그리고 여수반란사건
그해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전국의 유권자 788만 명 중 90.8%가 투표에 참여하여 무소속 85석, 대한독립총성국민회가 55석, 한국민주당이 28명, 대동청년단 12명, 민족청년단 6명, 조민당·한독당·공화당·대한노총·민족통일총본부 등이 약간 명씩 선출되었다. 도합 198명이 당선되었다(조병옥, 2003: 196).
선거 결과 김구는 설자리가 잃었다. 김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노선을 소련쪽으로 잡았다. 이 단체는 더 이상 김구에게 꽃방석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독당은 5.10선거로 미미한 존재가 되었다. 김구는 제도적 안에서 완전히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 사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1948년 5월 20일에는 남조선과도정부의 입법의원 그리고 5월 29일에는 민주주의원이 각각 해산 폐원하였다. 제헌국회 개회를 앞두고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소규모의 친목단체를 만들거나 또는 점차 각파 세력에 흡수되어 갔는데 한국민주당은 “국민회 무소속 등에 파뭍혀 있는 의원들을 규합하여 실세 80여 의원을 계산하고 있었고, 한국민주당과 국민회 출신 의원 중에 영남지방 30여 의원들은 무소속구락부를 형성하였으나 원내 제1당은 한국민주당이었다”(조병옥, 203: 196).
김구는 당장 노동자·농민이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들 가능성을 타진했다. 해방 후 남한 내 총자산의 약 8할에 달하는 공장·기업·토지·건물 등을 적산(敵産·후에 귀속재산)으로 하여 접수하고 이를 군정 관리 하에 두어 자본축적기반의 재편성 준비를 하였다(고바야시, 1982: 435).
이 시기의 “근로자를 비롯한 일반국민의 생활상태를 특징짓는 것은 대량의 실업자·반실업자군의 존재, 인플레의 진행에 따른 실질임금의 급속한 저락, 생존필요량 이하의 배급이 그나마 지연 내지는 건너뛰기를 하면서 노동자들은 물반을 쏟아내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가능케한 중요한 원인은 막대한 수의 실업자, 반실업자 및 아동, 여자들의 가계보조적 근로자들의 존재였다”(고바야시, 1982: 444).
이미 미군정 이전에 인민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뒤이어 1945년 10월에는 조선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고, 그 영향하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45년 11월 결성)·전국농민조합총연맹(45년 12월) 등이 속속 창설했다. 그에 따른 대중조직이 생겨났다. 이를 전후 해서 각종의 대중조직이 설립되어 나갔다. 다른 말로 미군정이 자리 잡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조직된 노동운동을 독점하리라는 조짐이 있다(이정식·로버트 A. 스칼라피노, 1982: 238).
더욱이 1945년 9월 2일 운송노동조합, 1945년 11월 5일 노동조합전국평의회, 10월 한달 동안 수많은 노조가 전국적·산업별 기초 위에 조직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와 좌익 온건파들은 당 조직에 몰두했다. 우익 지도자들이 이 분야에서 이니셔티브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이정식·로버트 A. 스칼라피노, 1982: 238).
각종 쟁의는 벌써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폭력과 테러를 앞세운 김구에게는 좋은 먹이감이었다. 이들만 연대한다면 김구는 제도권에 전전할 필요가 없었다. 1946년 9월 총파업·10월 대구폭동 그리고 다음해 1947년 3월의 총파업도 같은 맥락이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이 불을 붙였다. 차경환은 “1946년 10월 1일, 전날의 9월 대대적인 총파업을 주도했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조직원들이 시민들을 부추켜 대구시청으로 향했습니다. 주로 부녀자로 구성된 약 1000명의 시위대는 부댓자루와 큰 양푼을 들고 "쌀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도청에 가서 결판을 내자"고 외치자 군중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경북도청광장(현 경상감영공원)으로 몰려갔습니다. 이는 대구 10월 폭동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https://blog.naver.com/quixcha/223307215669).
1946년 9월 총파업은 10월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이른바 ‘10월 인민항쟁’이라고 공 산당이 불렀던 남한 전역에서의 근로자·농민·시민·학생들의 폭동은 10월 1일 대구에서 ‘쌀을 지급하라고’고 외치는 1만여 명의 시위군중과 경찰과의 대치로 시작되었다. 남한 전력으로 확산된 이 폭동은 대구·부산·광주·인천·대전 등의 주요 도시를 비롯해서 농촌에까지 파급되어 군청 소재지에서도 농민폭동이 일어났다”(고바야시, 1982: 463).
대구만 해도 “대구시민 15만 명 중 3분의 1 이상 폭도화했다. 폭동에 대한 안정장치를 가장 먼저 흔들어 버린 것을 바로 대구였다”(마크 케인, 일본일기(하), 115; 고바야시, 1982: 463).
그 과정은 “먼저 철도 종업원이 파업에 들어가고 이어 전화·금속·방적·전기 부문의 각 종업원과 조합이 이에 가세하였다. 하나의 파업이 경찰력에 의해 진압되면 다른 곳에 또 파업이 열렸다. 학생들은 가두로 진출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리하여 전 시가 들끓어 올랐다. 계속해서 폭동은 시내로부터 농촌으로 전파되어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폭도화된 농민은 쌀 공출을 거부하고 지주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더 나아가 경찰서까지 습격했다. 검거된 소작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유치장의 문을 깨고 서류를 불태우고 무기를 약탈하였다. 이 폭동을 진압한 것은 경찰·우익단체 그리고 미군이었다”(조선중앙연감, 1949:213; 고바야시, 1982: 463).
그 참가자를 보면 “대구폭동 참가자 수, 경기도 충북도, 충남도 강원도 경북도, 경남도 전남북도, 전남도, 서울 등에서 합류했다. 파업 264,474명, 시위 2,014,964명, 총 2,279,338명이었다”라고 했다(고바야시, 1982: 463). 시위가 있을 때마다 전국에서 동조 파업이 일었다.
1947년 3월의 3·1독립투쟁 기념일을 기하여 시위에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1일 서울·제주·부산·정읍·순천·영암 등의 지역에서는 3·1독립투쟁 기념일에 함께 모여 시가행진을 하자 경찰이 진압 내지는 발포를 했는데, 이러한 와중에서 대소의 충돌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3월 들어 경찰과의 충돌이 격발하는 가운데 전평 산하의 좌익계 노동자들은 3월 22일 24시간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당시 남한 근로자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사회경제 상태와 그들의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대한 바람을 반영한 것임에 이를 좌익계가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폭동은 서북청년단 등 반공청년단체와 우익 대한노총 그리고 경찰의 기민한 저지로 신속히 진압되었다”(고바야시 에이오, 1982: 468∼9).
이러한 폭동과정은 또한 전평의 비합법적 과정이기도 했다. 총파업 발발 다음 날인 3월 23일 수도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수도경찰청 특별 발표를 통해 이 총파업을 주도한 계급적·전투적 조직들, 즉 5개단체(남로당·민청·전평·민전·전농)의 지도간부 전원에 대해 체포를 명하고, 이들 단체의 일체의 합법적 활동을 금지했다. 또 경찰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비롯한 우익민족진영 단체는 이들 조직의 파괴에 전력을 기울렸다”(고바야시 에이오, 1982: 468∼9).
이 시기의 노동쟁의는 단지 노동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농민·일반시민·학생들을 총망라한 정치적 성격을 가졌다. 희망을 본 국민은 시대의 검은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군정청·경찰·반공우익민족진영 단체의 좌익에 대한 대처가 후기에 갈수록 적극적으로 기민해졌다는 점이다(고바야시, 1982: 472).
대구폭동과 제주4.3사건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여순사건(1948.10.19∼25)은 5.10 총선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전자가 제도권 안의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통일선전전술이라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이었다(전용헌, 1986: 619). 쉽게 말하면 전자는 레닌·스탈린 볼세비키혁명전술이며, 후자는 마오쩌둥의 혁명전략, 즉 게릴라전술이 적용되었다.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제도권에서 불법화되고 밀려서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과정을 보면 우선 “박헌영을 비롯한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통일전선전술 원칙에 입각하여 8·15 해방 이후 국내 정치 세력과는 물론 해외 세력이있던 이승만·김구 계열의 정치지도자들과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에 의한 연합과 합작을 시도하였다”(전용헌, 1986: 619).
그후 남로당과 일반대중은 혁명세력으로 연결시키는 혁명의 전도대 내지 지렛대로서 전위 조직을 조직하였다. 여수반란사건은 군이 주체 세력이 되어 노동자·학생·농민 등 동조 세력을 투쟁의 2차 세력으로 동원하였다. 그러나 5.10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의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그 선거로 이승만은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고, 김구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김구는 그 당시 야인 신세를 면치 못할 시기였다.
“단선·단정 반대를 명분으로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가 일으킨 4.3사건은 5.10 총선거 이후에도 진압되지 않았다”(전봉관, 2025.05.10). 또한 그해 4월 3일에는 제주도에서 총기 수류탄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전도 15개 경찰지서 가운데 11개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시작하였다(조병옥, 2003: 194). 한라산의 지리적 특수성으로 경찰의 토벌로서는 공비와 폭도들을 완전 진압할 수가 없어서 4월 말부터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합동작전을 하여 그해 6월 초순에는 대체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들은 소련제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폭발물을 소지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 수립 이후 경비대를 모태로 창설된 ‘국군’은 군내 좌익 세력을 축출하는 ‘숙군(肅軍)’에 들어가는 한편,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미주6)를 비롯한 3개 연대에서 차출한 3개 대대를 제주도로 추가 파병하려 했다.
그해 10월 19일 밤 제14연대 남로당 조직 책임자였던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남로당 핵심 세포 40여 명은 3발의 예광탄을 신호로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했다. 영내에 남은 장교들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렸지만, 반란군은 장교들을 보이는 대로 사살했다”(전봉관, 2025. 05. 10).
1946년 7월 초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스탈린은 공산당 이름을 버리고 ‘근로인민의 대중정당’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그 지시에 따라 한 달 후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통합한 북조선로동당, 그해 11월 말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 3당이 합당한 남조선로동당이 출범했다. 조선공산당은 입당 절차가 까다로워 3만여 명의 정예 당원으로 유지된데 반해 ‘대중정당’을 표방한 남로당(미주7)은 ‘당원 5배가(倍加) 운동’을 전개해 20만 명이 넘는 신규 당원을 모집했다(전봉관, 2025.05.10.).
한편 남로당은 공공부문뿐만 아니라 민간영역에도 뿌리 깊게 침투할 수 있었다. 게릴라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더욱이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이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고 연설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2000여 반란군의 공격을 여수 경찰은 2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아침이 밝기 전 여수 전역이 반란군 손에 떨어졌다(전봉관, 2025.05.10).
당일 순천이 반란군에 점령되었고 이후 광양·보성·구례·곡성이 차례로 반란군 수중에 넘어갔다. 23일 순천, 27일 여수가 진압군에 수복될 때까지 일주일 남짓한 기간 전남 동부 지역은 집집마다 인공기가 게양되었고, 지역별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곳곳에서 인민재판과 즉결 처분이 이어졌다(전봉관, 2025.05.10).
참혹한 현실이 재현되었다. 여순 현지의 ‘총탄에 쓰러진 시체’ ‘길거리 여기저기 눈에 띄는 시체’ ‘타는 사체’ ‘기계와 구루마에 운반되는 시체’ 또 ‘장사 지내지는 시체’ 아니면 ‘주인 없는 시체’는 전체적으로 여수지역민의 삶의 공간으로서의 길거리를 ‘주검의 거리’로 변형시켜냈다(동광신문, 1948.11.2.; 임종명, 2005.3; 3/35).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1997년에서 2003년까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순사건으로 1만여 명이 희생되었는데, 군경에 의한 학살이 9500여 명, 좌익에 의한 학살이 500여 명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을 향한 남로당의 공격이 없었다면, 좌익에 의해서건 군경에 의해서건 생기지 않았을 희생이었다. 여순사건 이후 제14연대는 해산되었고, 국군 부대 단위별 명칭에 ‘4’ 자를 넣지 않는 관행이 생겼다. 1949년 10월 남로당은 132개 좌익 정당·사회단체와 함께 등록이 취소돼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퇴출당했다. 그러나 남로당 잔당들의 난동은 6·25전쟁 휴전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전봉관, 2025.05.10).
그 역사적 의미는 깊은 상처이었다. 여순사건 이후 한국 정부는 군부에 침투한 좌익계의 색출을 위한 숙군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아니었다. 그 피린내 나는 내전은 적과 아군밖에 없었다. 신설된 국가보안법의 도움으로 정부는 이후에 대규모의 조직 사범들을 구속 체포했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4월까지 8만9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2만2606명이 기소되었다. 기소된 자들 중 80%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핸더슨, 2000, 252; 김용직, 2014: 28).
4. 김구의 직·간접적 유산
이승만의 보안법·농지개혁 그리고 남조선의 경제발전은 피비린내 나는 인고의 산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1948년 3월 30일에는 선거등록이 개시되면서부터 각지에서 선거를 방해하는 좌익의 파괴행위는 날로 심하여 5.10 총선거가 끝난 뒤 경무부에 집계된 파괴 건수는 선거사무소·관공서의 습격 방화 등이 348건 선거위원 입후보자 공무원 및 그 가족, 우익인사들의 피살이 147명, 부상이 60여 명에 달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폭도들의 만행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병옥 경무부장은 미리 향보단을 조직케 하고 경찰지서 단위의 각 지역에 55세 이하 청장년의 지원자로서 경찰과의 협력하에 자발적인 자위조직을 구성케 하였다. 이 향보단은 선거가 끝난 후 선거 실시에 많은 공적을 남기고 1948년 5월 22일 역사적인 해단식을 하였다.
상처도 깊은 것은 사실이었다. 여수반란 사건은 남로당에 의한 게릴라 전쟁으로 그 희생은 엄청났다. 김구는 레닌·스탈린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강하게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의 그림자는 당시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더욱이 마오쩌둥의 인해전술까지 구사했다면, 그는 1949년 6월 26일 암살이 당연한 귀결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정부의 스케줄은 멈추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전국의 유권자 788만여 명 중 90.8%가 투표에 참아하여 무소속 85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 한국민주당이 28명, 대동청년단 12명, 민족청년단 6명, 조민당, 한독당, 공화당, 대한노총, 민족통일총본부 등이 약간명씩 선출되었던 것이다. 도합 198명이 당선되었다.
중앙선거위원회의 절차에 따라 1948년 5월 31일에는 역사적인 2년간이 제헌국회 개원식이 거행되었고, 이날 임시의장으로 이승만 박사가 추대되고 국회임시준칙을 채택하여 이에 따라 의장에는 이승만 박사, 부의장에선 신익희·김동원(金東元) 양씨가 당선되었다. 북한으로 봐서는 통탄할 일이다. 북한 김일성 임시정권은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가 평화리에 완료되자 이를 계기로 5월 14일에는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했다.
북한은 늘 폭력과 테러로 대한민국을 대했다. 문제는 김구였다. 당시 이승만은 경찰의 힘을 가졌다면, 김구는 여수사건과 같이 일부 군과 군중의 폭력성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늘 대량학살·방화·고문·감금 등과 같이했다. 상해임시정부는 그렇게 폭력과 테러 그리고 살인문화를 숙명적으로 수용했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포병사령부 장교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결국 그가 믿고 있었던 군 장교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김구의 폭력과 테러 자행의 성격 때문에 그는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함이 틀림이 없었다. 대한독럽촉성국민회와 한독당 등 어디에도 김구를 환영하는 곳이 없었다. 제도권은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나 그 후의 평가는 다르다.
“김구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살인·죽음의 비를 몰고 다니는 짙은 먹구름이자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열사로 둔갑한 역사인을 대표한다”(정안기, 2024: 427).
물론 거짓 내용이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그 내용을 접하게 되면 진실이라 믿게 되는 경향성이다. 최훈 한림대 교수는 중앙일보 ‘심리만화경’(2025.05.28)에서 ‘가짜 뉴스도 계속 들으면 진짜가 됩니다’라고 했다. 김일성 신화나 김구 신화나 막상막하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환상하는 김구는 종북주사파가 만들어낸 역사적 허상이다. 1980년대 중반 종북주사파는 사회악의 모든 근원은 친일 미청산에 있다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초해서 이승만 깍아내리기를 위한 대항마로 김구를 띄우기 시작했다.
종북주사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로젝트로 회자되는 ‘김구 띄우기와 이승만 깎아내리기’의 역사 공작은 ‘통일의 화신 김구,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라는 거짓 프레임으로 재구성되어 한국인들을 세뇌시켰다(정안기, 2024: 427).
그렇다고 김구의 업적이 부정적인 것만 아니다. 그의 경력에 어른거리는 살상 그리고 폭력과 테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절대 빈곤상태에서 민주공화주의는 제대로 굴러갈 이유가 없었다. 이승만정부는 대구폭등·제주4·3사건 그리고 여수반란사건 등을 경험하면서 농지개혁(農地改革)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 법은 ‘1949년 6월 21일 제헌국회에서 제정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유상분배함으로써 자영농 육성과 농업생 산력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농지개혁법은 농지 매수·분배사 업은 미군정의 귀속농지 매각사업과 함께 대한민국 토지개혁의 주요 역할을 했다.’
또한 제도권은 자유뿐만 아니라 균등에 귀를 기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농민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948년 7월 12일 헌법은 프롤레타리아 원성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전문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한다”고 천명해 근본적인 헌법 정신부터 균등 경제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국은 생각이 달랐다. “1946년 말∼1947년 초에 한국의 경제부흥 정책을 구상했는데 이는 탈식민지화 정책하에서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 군정이 종식되고 1949년 1월에 주한미사절단(AMIK·American Mission in Korea)이 설치되었으며 대한(對韓) 원조의 책임이 경제협조처(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이관되었다. 경제협조처는 원래 유럽에서의 마샬 계획(유럽부흥계획)을 책임지기 위해 창설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전쟁 복구가 아닌 재건 또는 부흥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재·설비 중심의 원조였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과 함께 경제협조처의 원조는 중단되고 구제·구호적 성격의 한국민간구호(CRIK·Civil Relief in Korea) 원조가 지원되기 시작했다”(박정이, 2024.08.26.).
전쟁은 곧 소강상태에 빠지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한국 경제 운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1950년대 미국의 대한 경제 정책은 ‘경제성장’보다는 동북아 안보를 위한 ‘경제안정’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1951년 이후 미국의 대외경제원조는 상호안전보장법(MSA·Mutual Security Act)에 의해 대외활동본부(FOA) 및 국제협력국(ICA) 원조로 제공 되었는데, 장기적인 경제발전보다는 경제 안정과 군사예산의 보전을 중심으로 실시됐다”(박 정이, 2024.08.26).
그러나 전후 복구사업뿐만 아니라 세계 공급망 생태계에 진입할 수 있는 헌법의 장애를 갖고 있었다. 중도파 혹은 좌익에 경도된 균등사상을 도려내야 했다. 또한 제헌헌법은 제6장에 경제 조항을 두고 있는데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제84조)”고 규정하여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체계에 대한 강력한 헌법적 제한을 가하였다. 요컨대 제헌헌법은 안재홍 중도파 그리고 좌익들 초안 작성자가 언명했듯이 “사회주의적인 균등의 원리를 채택하되,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장점인 각인의 자유와 평등 및 창의의 가치가 조화되고 융합되는 새로운 국가 형태를 실현함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었다(박정이, 2024.08.26.).
균등을 강조하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할 수 있었다. 6·25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자본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자본가의 자본 축적을 제한하는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통상을 전공한 이승만 국회의장은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압력은 예견된 일이었다. 미국은 국유화와 사유재산권의 제한을 명시하고 있는 한국의 헌법 경제 조항을 문제 삼은 것이다.
“미국은 1952년 5월 한국 주재 미국경제고문단이 한국 정부와 함께 한국 경제의 운영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검토·결정할 기구로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를 설치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경제조정 협정(마이어협정)’을 체결했다. 이 합동경제위원회에서는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완화와 자유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한 헌법 개정·귀속재산 불하 촉진·은행의 민영화·외국인 투자의 촉진 등이 협의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경공업·기간산업의 동시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한·미가 합의한 개헌안을 발의해 그해 11월29일 통과시켰다(박정이, 2024.08.26.).
이 법의 효과는 중요 자원의 국유화와 공공기업의 국영을 규정한 헌법 제85조·제87조, 그리고 사기업의 소유권을 제한하던 헌법 제88조의 내용을 대폭 수정하기에 이른다. 균등·평등의 경제는 시장경제로 향했고,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공급망 생태계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54년 4월 17일 ‘국영 및 정부관리 기업체에 대한 해제조치 요령’을 통과시켜 단계적으로 국영기업체의 국영 지정을 해제하고 정부 대행기관에 대한 대행 지정을 취소했으며 대규모 귀속 기업체를 불하 조치했다”(박정이, 2024.08.26).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를 1952년 5월 설치하고, 그 이듬해 북진통일론을 펴고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보위조약’을 성사시켰다. 이어 1952년 11월 29일 한미 합의에 의한 개헌안으로 경제관련 법을 고치도록 한 것이다. 제헌헌법 제85조,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 공공 필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하거나 또는 특허를 취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제87조 중요한 운수·통신·금융·보험·전기·수리·수도·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둔다.
제헌헌법과는 달리 현행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의 재산권이 강화되었다. 제120조 ①항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수산자원·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할 수 있는 자연력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채취·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할 수 있다. 제122조, 국가는 국민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 제126조,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
▲미주(尾註)
1)테러와 테러리즘은 정치와 종교·이념 등 다양한 목적과 신념으로 동기화되는 비합법적 폭력을 총칭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테러의 목적은 정치권력 쟁탈, 정치적 탄압에 대한 저항, 혁명적 목적의 달성 등이었다(정안기, 2024, 15쪽). 버크는 프랑스혁명 발발 직후인 1790년 펴낸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이란 저작에서 혁명의 과격성과 급진성을 비판하고자 테러 테러리즘 용어를 고안해 냈다. 테러와 테러리즘은 유사한 용어로 정착하면서 ‘공포와 충격을 유발하기 위한 정치적 폭력 행위’로 의미했다.
2)정적의 테러는 김구의 1945년 11월 환국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정적을 대상으로 특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 희생물이 1945년 12월 송진우, 1947년 7월 여운형, 1947년 12월 장덕수 등이다(정안기, 2024: 32).
3)그 후의 내력도 김구는 북한과의 합작을 계속했다. “김구와 한독당은 1947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서도 ‘8·15 이후 최대의 수확’(서울신문, 1945.10.09)이라며,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동아일보 1946.11.18). 1948년 4월 남북협상에도 앞장섰고, 북한을 민주기지로 삼아 남한을 소비에트화시켜 인민공화국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연공합작에도 합의했다(조갑제, 2009.9; 정안기, 2024: 422). 1948년 김구는 1948년 5.10 총선을 보이코트했고, 1949년 6월 안두희의 총격을 받아 즉사하는 날까지도 대한민국을 과도정부쯤으로 간주하고 무너뜨리고자 획책했다”(정안기, 2034: 422).
4)김구(金九·1876.8.29~1949.6.26)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그리고 정치인으로 자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연상(蓮上) 등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이름인 두래(斗來),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내륙으로 피난했던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김구).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 생활을 하였으며,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양산학교·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았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교육계 활동을 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그리고 제3대 국무령 (1926.12.10~1927.4.11), 제1·2대 국무위원회 주석(1940.10.9.~1947.3.3) 등을 지냈다(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김구).
5)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선언문 ①우리는 대한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울 것을 선언함 ②우리의 운동은 정당·정파를 초월한 순연(純然)한 국민운동임을 선언함 ③우리는 남북과 좌우의 통합을 기하여 사상적으로나 지역으로나 통일완수를 위하여 사력을 다할 것을 선언함. 대한독립촉성국 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대한민국의 초대 여당이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하였다(https://namu.wiki/w/%EB%8C%80%ED%95%9C%EB%8F%85%EB%A6%BD%EC%B4%89 %EC%84%B1%EA%B5%AD%EB%AF%BC%ED%9A%8C).
6)1948년 5월 창설된 제14연대는 ‘붉은 연대’라 불릴 정도로 남로당원이 많았다. 20여 명의 장교 대다수가 중앙당 당원이었고, 병사 10명 중 1명이 전남도당 당원이었다. 모병 실무책임자였던 김지회 중위는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으로 남파된 남로당 중앙당 세포였다. 그는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구를 존경하느냐?” 물어서 박헌영을 존경한다고 답한 지원자만 병사로 선발했다. 그 때문에 제14연대 병사의 ‘반수 이상’이 좌익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전봉관, 2025.05.10).
7)공적 기구에 남로당이 진지전 구축을 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관공서·국방경비대·학교 등 주요 기관에 ‘당원 세포’를 조직적으로 침투시켰다. 1946년 1월 창설된 경비대는 사상 검증과 신원 조회 없이 자원 입대자를 받아들였다. 선발·보임·전출입 등 인사권이 중앙으로 일원화돼 있었던 경비대 장교에 대한 공작은 중앙당에서 맡았다. 남로당은 핵심 당원을 사관학교에 입교시키기도 했지만 남로당 세포 장교가 학연·혈연·지연 등 인간관계를 이용해 동료 장교들을 포섭하기도 했다”(전봉관, 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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