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을 다루는 영화제의 인권이 짓밟히는 일이 벌어졌다. 메가박스동대문은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의 출품 영화들을 상영하기로 했다가 갑작스레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전석 매진이 완료됐고, 상영도 예정대로 될 거라고 믿고 있던 영화제 측은 영문도 모른 채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영화관 측은 뚜렷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그저 ‘영화제가 너무 정치적이어서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로 했다’는 입장만 전하고 있다. 영화제 측과 상영계약을 하고 예매까지 마친 상황에서 갑작스런 취소를 했다는 것은 누군가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루어 짐작컨대 특정한 영화에 주목하고 있던 중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주한중국대사관을 통해 외교부나 통일부 등 관련 부처에 입장을 전달했고,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한 정부 쪽에서 메가박스 경영진에게 상영중지를 압박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화관 측이 갑작스레 일정을 중지한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관 입장에서는 상영계약을 마치고 예매까지 마친 영화를 중지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전석매진이라면 영화관 매출에 도움이 될지언정 손해를 끼칠 턱이 없다. 영화관 입장에서는 상영할 영화가 무엇인지보다도 매표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일반적이다. 이번에 상영하기로 했던 ‘국유장기’나 ‘시대혁명’ 같은 작품은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다큐멘터리이고 국내 상영에도 주목을 받고 있는 경우다. 영화관 측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유장기’는 법륜공(파룬공) 신도들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은 끝에 이유없이 체포되어 알 수 없는 곳에 구금되고 결국 장기를 강제로 적출당하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는 법륜공 신도들이 사회에 해악을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이념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 공산당 간부들의 비밀스런 금지 조치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가 비밀스럽게 퍼져 나가는 상황을 우려한 로마 지배층이 교인들을 탄압한 사례와 흡사하다. 법륜공 신도에 대한 탄압은 단지 공산당의 유력 인사가 법륜은 위험하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는 말 때문이다. 공산당의 공개적 지침은 그대로 법이다. 아니 법위에 군림하는 교시다.
중국 정부에 맞서는 일이 퍼져 나갈수록 법륜공 신도는 불법적이고 무한적으로 탄압받고 있다는 영화의 주장은 중국 정부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저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공산당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법이고 절차도 필요없이 막무가내로 막으면 된다는 발상이다.
더 놀라운 일은 이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좌파 영화인들이다. 지난해 9월 대전에서 열린 대전여성영화제에서 대전시가 몇몇 작품을 지정해 상영중지를 요청하자 부산영화인연대‧영화수입배급사협회‧한국독립영화협회 등 17개 단체는 ‘영화산업위기극복영화인연대’라는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전시는 시민에 대한 공익적 의무를 다하고 부당한 간섭을 중지하라는 내용이다. 비록 대전시가 후원하는 영화제라 하더라도 특정 영화의 상영을 막는 것은 영화제의 자율적 운영을 방해하는 행동이며 그같은 요구를 철회하라는 것이다.
대전시는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특정 영화가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양성평등 주간에 상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대전시 보조금으로 상영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들어 영화제 측에 상영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자 주최 측은 대전시 보조금 지급을 전면 보이콧하고 대신 시민모금을 통해 영화제를 예정대로 열었다.
2014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 벨’(2014)이란 다큐멘터리 작품의 상영을 두고 영화제 측과 부산시가 극단의 마찰을 일으킨 사건도 영화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다. ‘다이빙 벨’은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에 대해 일방적인 주장을 담은 영화여서 상영이 곤란하다는 부산시의 입장이 나오자 영화제 측은 물론 박찬욱‧봉준호 등 유명 영화감독과 단체들은 부산영화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논란을 무릅쓰고 영화는 예정대로 상영됐지만 부산시가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재임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임기 만료에 따른 해촉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 일은 영화계의 민감한 토픽이 되었다. 그때 좌파 영화인들이 내건 주장은 ‘영화제의 자율성을 해치지 마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주장은 좌파 영화가 한국 현대사를 비난하더라도 영화와 관련된 개인이나 단체 등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돼 왔다.
광주5‧18 당시 계엄군을 무자비한 가해자, 총을 든 시민을 무고한 희생자로 묘사한 ‘화려한 휴가’(2007)나 박정희 대통령을 권력욕에 빠진 야비한 독재자로 묘사한 ‘그때 그사람들’(2005),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독재에 항거하는 의로운 투사처럼 그린 ‘남산의 부장들’(2020), 공동경비구역(JSA)에 복무하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 대해 JSA전우회에서 사실을 왜곡했다며 항의했을 때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을 침략자로 묘사한 ‘웰컴 투 동막골’(2005), 노근리 지역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그린 ‘작은 연못’(2010), 제주4.3 사태 당시 숨진 민간인 이야기를 다룬 ‘지슬’(2013) 같은 영화가 논란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런 영화들은 누가 항의하고 제재를 가하려는지가 분명했지만 이번 락스퍼영화제 상영 취소는 누가 무엇 때문에 벌인 일인지 오리무중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결과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사건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지만 영화제 측을 제외하고는 그 많은 영화 단체 중 어느 곳에서도 항의하는 성명을 내놓은 곳이 없다.
우리 편이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벌떼같이 달려들지만 우리 편이 아닌 경우에는 무슨 일을 당해도 못본 척 하는 것인가. 좌파 영화인과 단체들의 이같은 선택적 분노는 영화인이 아니라 특정 이념과 세력을 추종하는 돌격대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다.
상영이 취소된 영화들은 다른 상영 장소를 찾아 겨우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영화와 관련해 국가에서 영화제 측에 압력을 넣는 것이라면 오히려 영화제를 더 키워주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조용히 지나갔더라면 관심있는 관객이 보는 정도에 그쳤겠지만 상영을 막는 바람에 해당 영화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졌고, 올해로 5회째를 맞은 락스퍼국제영화제의 위상은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상영중지 덕분에 여느 작품 중의 한편으로 그칠수도 있는 영화를 오히려 홍보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인권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를 정치적인 영화로 만들어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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